40대 아재 썰 + 코인으로 30억 번 이후의 삶.long ssul

자유게시판

40대 아재 썰 + 코인으로 30억 번 이후의 삶.long ssul
댓글 0 조회   397 추천 1 비추천 0


코인갤러...27억 벌은 후 5년동안의 삶.jpg

https://www.dogdrip.net/457657641

 

개드립에 올라온 글 이거 보고 생각나서 술도 한잔 했겠다.

이 아재의 삶을 잠시 회고해본다. 개스압이다. 시간없는 개붕이들은 다른 글 봐라

 

 

나는 40대중반 아재다.

 

지방에서 태어나서 계속 지방에서 살다가 겨우 지방 전문대 2년제 들어갔다.

전공은 적성에 안맞아서 한 학기 다니는둥 마는둥

유흥비와 오토바이에 미쳐서 노다가판에서 돈을 벌었다. 

경남 경북 쪽에 내가 지은 펜션, 숙박만 한 100채는 넘을거다. 

 

오토바이 사고나 나서 아버지께서 합의금을 내주신다는 조건과 군입대를 바꿨다.

군대에서는 운좋게 편한 보직에 걸려서 책읽을 시간이 많았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독서량이 이때 였던것 같다.

 

그러다 어떤 미술+철학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너무 감명 깊어서 한 20번은 읽었다. 

가슴속이 뜨거워지면서 그림, 미술, 글씨,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구체적으로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나는 그게 하고 싶었다.

 

사실 난 어렸을때 부터 그림그리고 글씨쓰는 것 좋아했다. 

그런데 미대는 커녕 학원을 다닐 엄두도 못냈다.

시골이라 학원같은것도 없었고 집이 너무 가난했다. 

 

초등~중학교까지 동네 개천에 큰 바위를 스캐치북 삼아

붓으로 물찍어다가 글씨쓰고 그림그리며 혼자 노는 일이 좋았다.

 

맑은 날 열이 많이 받은 바위에 붓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쓰면 잠시 후 증발하면서 사라지는데

그렇게 휘발성 습작을 그려나갔던 것이다.

지금도 초여름날 물이 반짝거리는 개천과 그 공기와 습도와 개천의 냄새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행복했다.

 

 

 

군대다녀와서는 복학하기는 싫고 다시 경남경북일대 펜션짓는 노가다하며 돈을 모았다.

지금 노가다판은 모르겠는데 그땐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단순 시다부터 공구리 타일 도배 전기 목공 운전 등등 시키는건, 돈되는건 다 했다.

아버지가 다치셔서 집에 돈 벌 사람이 나밖에 없었고

또 그때 20대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하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라는걸

군대 선임이 소개했고 한 번 외국에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찌저찌하다가 호주에 갔다.

군대가기전후로 죽어라 노가다만 뛰다가 간 호주에서의 '워킹'은 나에겐 쉬웠다.

 

상대적으로 한국인 오야보다 호주boss들은 나이스했고 근무 강도도 상대적으로 약했고 페이도 좋았다.

대충 한국에서 1달 일하면 100~300만원 수준이었고

호주에서의 초반은 주5일제 누리면서 한달에 한 300~500만원 정도 벌었던것 같다.

 

그러다 호주에서 알게된 사람을 통해 통해서 호주의 건축업자를 알게되었다.

예상했겠지만 한국에서의 건축노가다의 밀도있는 업무강도와 노하우는 호주에서 빛이났다.

 

영어랑 운전 빼고 다 할 수 있었던 나는 그들 입장에서는 말도안되는 미친 1인 어벤져스 였던 것이다. 

역시 K-노가다

 

처음엔 나를 인간취급도 안하던 호주 오야지 마음에 결국 들었고

넘버투로 한 1년간 호주의 고급주택, 아파트 공사들을 거의 전담했다.

주말, 휴일, 크리스마스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다.

 

그 다음해에는 한국에서 알고지내던 노가다판 형동생 셋 정도를 한국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나에게 팀 세팅 권한을 준것이다. 그 멤버+몇몇 외국인(동남아,인도계) 팀을 2년반을 더 호주에서 일했다.

 

제법 돈이 모였다. 한국에 돌아가서 같이 사업을 하는 걸로 결심하고

귀국전 노가다 브로들과 1달 동안 호주 여행을 시작한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승합차 한 대 빌려서 호주투어하는 관광상품이 있었다.

승합차는 마치 시내버스처럼 지정된 루트를 따라 투어를 하고

그 경로를 여행하기를 희망하는 손님을 태울 빈자리가 있으면 받는 그런 구조. 

 

어느 날 합류하게된 투어 멤버 중 한국 여자애가 있었는데

경상도 말투를 써서 금방 친해졌다.

 

울 어머니와 고향이 같더라. 경주. 심지어 초등학교 후배였음.

근데 이야기해보니 미술교육 전공하는 대학생이더라.

 

와... 그때 마음속에 찡- 하게 울림이 있었다.

타국에서 돈 버느라 미쳐서 잊고 있었던 미술이라는 꿈.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미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대구에 방을 잡고 재수학원과 미술학원 두 군데를 등록했다. 이때가 내나이 스물 다섯쯤.

부산이 가까운 대도시였지만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고향에서 많이 멀지 않고 연고가 없는 대도시인 대구로 결정한 것.

 

공부는 무슨말인지 전혀 모르겠고, 입시미술은 힘들었다.

근데 그냥 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그림만 그렸다.

 

그러니 1년 반을 해서 결국 모대학 시각디자인에 들어갔다.

그리고 행복하게 공부하며 졸업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병간호를 해야해서 1년반을 휴학 했고 서른한살쯤에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학교도 포트폴리오도 나쁘지 않았기에 (내가 보기에) 어찌저찌 면접까지는 가더라도 나이때문에 안되더라.

 

어렵게 취직한 곳이 모중소투자회사 홍보실 디자인 담당.

내가 생각하던 디자인 그런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벤트 홍보물, 배너, 상품 안내 찌라시 등등을 만들었다.

월급도 별로. 호주에서 마음먹으면 한달에 1000~1500만원까지 벌던 내가 그 월급은 당연히 성이 안찼다.

그래도 다녔다. 이런데서 우선 경력을 쌓으면 좀 더 좋은 회사 갈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뭔가 멋있는, 잡지에 나오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쉽게 깨졌다.

4~5년을 다녀도 이직이 쉽지 않더라.

포트폴리오는 엉망이었고 나이도 문제였다.

 

그러다 눈을 돌린것이 재테크였다.

작은 회사 특성상 타 부서 아재들과 교류가 잦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주식투자,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생겼다.

 

아까 위에서 말한 미술에 대한, 디자인에 대한 열정? 여의도에서 몇년 일하면서 그런건 진작 사라졌다.

아, 그와중에 결혼도 했다. 자식은 없다. 계속 없을것 같다.

 

이런저런 투자를 해봤다.

주식 단타, 장기, 미국시장, 선물, QQQ 많이 벌기도 잃기도 했다.

 

 

그러다 알게된 가상화폐의 세계.

근본 비트코인을 비롯한 잡코인 투자에 2년을 미쳐있었다.

나름 리스크관리한다고 단타와 장투를 섞어서 했다.

 

단타를 위해 퇴근하고 집에들어오면 방에 들어가서 12시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00시부터 출근할때까지 트레이딩을 했다.

출근하고 나서도 거래는 계속했다. 지금은 막혀있다는데 그때에는 사무실에서 pc로 거래가 가능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우리팀은 일 없을때는 뭘하든 터치안하는 분위기였다. 그냥 차트보나보다 여겼다. 

 

같았다. 몸도 많이 상하고.

 

 

 

2억 정도로 시작했는데 결국 30억이 되었고

내 나이는 대략 마흔이 되었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몸이 많이 상했다더라. 머리도 많이 빠지고.

쉬고 싶었고 모니터로 하는 일은 뭐든 하기 싫었다.

 

 

퇴사를 하고 와이프 고향 경주에 건물을 샀다. 시내쪽은 아니고 변두리.

5층짜리. 새건물 대출없이 전액 현금.

 

1층은 상가, 2~4층은 투룸 임대주고 있다. 투룸은 공실 몇개 있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5층은 우리 부부가 살기로 했다. 방 4개 + 테라스.

 

 

서울 생활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온지 2년 조금 넘었다. 코로나 터지기 전에 내려옴. 

와이프는 서울에서 좀 더 살고 싶고 대학원도 다니고 팀 작업하는게 있어서

바로 지방으로 내려오진 못하고 올해말이나 내려올 예정. 지금은 주말부부로 산다.

 

 

 

 

그러면 나는 지금 무얼하며 사느냐.

 

집 뒷마당에 샌드위치 판낼로 작업실을 하나 차렸다.

겨울엔 좀 추운데 그냥 그냥 살만하다.

 

예상했지만 건물과 작업실 인테리어는 내가 다 쳤다.

k노가다 짬밥 살아있더라.

 

느즈막한 오전에 일어나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유화, 아크릴로 주로 그리는데 얼마전 방송에 나온 기안84작업실 같은 분위기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거다.

 

창의력은 별로 없는지 내 순수 창작물은 내가봐도 같다. 

모에화 창작물을 그려서 개드립에 올릴까 하다가 덕 역시 내 체질에는 안맞더라.

그래서 요즘엔 구글아트프로젝트 켜놓고 그림따라 그린다. '모화' 라고 하면 좋을듯.

목표는 강남고터 지하상가같은데 납품하는것.

 

날씨 좋고 기분 좋으면 경남경북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맛기행을 한다.

유튜브 채널 섬마을훈태라고 아나? 거기 나온건 왠만하면 다 가봤다. 술집 빼고

 

서울의 교통체증과 대중교통에 쩔어살다가 지방에 다시 오니까

차도 안막히고 너무 좋다. 어딜가도 2시간 이내면 다 간다.

공기도 좋다. 만나는 사람이 식당아줌마들, 헬스장 직원들 말고 거의 없다.

사람에 치여서 스트레스 안 받아서 좋다.

 

저녁먹고 근처 아파트 단지에 헬스장에 간다.

PT좀 받다가 요즘엔 그냥 혼자 운동한다.

아령, 머신 좀 깔짝 대다가 유튜브 슈카, 깝도이, 간다효, 짬타수아, 곽튜브 같은거 보면서 러닝머신에서 한 두시간 걷다가 온다.

 

자전거도 탄다. 동호회에 들어가서 좀 타다가 짜증나서 혼자 탄다.

대한민국의 모든 동호회는 장비자랑 하는 들, 어떻게 좀 해볼라고 하는 발정난 남녀들이 문제다.

예뻐서 비앙키 산 내가 제일 문제다.

 

 

그리고 사실상 본업은 언데드 흑마

주6일 공대의 공대원이다.

 

 

 

가끔 친구들이나 후배들 놀러오면

옥상에서 고기구워먹고 작업실에서 손흥민 선발경기보며 맥주마시고 논다.

작업실에 겁나 큰 TV걸어뒀다. 거의 100인치짜리. 니들도 사라 어젯밤엔 케인 모공까지 보이더라. 

 

교사인 와이프에게는 그만 두라고했는데 그래도 나는 애들 가르치는게 좋다고 계속 학교나가겠단다.

존중한다. 사랑하기도 하고.

이 게시판에서 일론마스크님의 다른 글